1. 배터리 팽창

딱!

부러지는 듯한 소리에 놀랐다. 뭐가 떨어졌나, 살펴봤지만 주위는 멀쩡. 뭐지 싶었지만 그렇게 며칠을 보낸 어느 날,

맥북 왼쪽 아래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배터리 팽창이구나, 직감이 왔다. 근데 벌써? 이럴 수가. 보증 기간이 지났다고! 홈페이지에서 알아본 배터리 교체 비용 때문에 다시 심란. 애플에 전화를 해보긴 했는데, 역시나 별다른 답은 없고 그간의 경험으로 사설 수리(혹은 자가 교체 도전) 하거나 아니면...아아...생각하기도 싫은 후처리...

 

예상 배터리 수리 비용이 36만 원인데 정말, 혹시나, 조금 싸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어찌어찌 백업을 하고 여차저차 날을 잡아서 지니어스바 방문. 목적은 정확한 수리 견적을 산출하여 노트북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함이었는데,

 

검사상 배터리 문제는 잡히지 않는데 키보드 품질 프로그램에 들어가 탑케이스 무상 교체! 품질 프로그램은 4년이고 내가 2주를 남긴 상태로 매장에 간 것이다....! 눈물이 날 뻔했다. 노트북 환골탈태의 계절이다. 배터리가 팽창한 덕분이다. 아니면 나비의 보은인가. 내역서에 적힌 수리비는 부가세 포함 90만 원이 넘는다. 가성비 노트북 한 대 가격이다. 내 손목을 앗아간 나비식 키보드가 날 살렸다. 하지만 나비식도, 터치바도 버린 사과회사. 내 참.

 

 

 

2. 벤츄라 싫어요.

아니 왜 OS를 다시 깔고, 게다가 최신 OS를 깐다는 건데요. 난 쓰던 거 원합니다. 
애플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해드립니다. 쓰던 거 깔아 드릴게요. 
점검과 수리 내역을 확인하고 사인까지 했으나 머릿속 물음표를 남긴 채 귀가. 왜 OS를 (다시) 깐다는 거지? 하여튼 확실하게 백업하자. 타임머신을 돌리자.

 

아이클라우드에도 백업하는데, 동기화까지 왜 이리 오래 걸려. 21세기 맞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외장을 하나 살 걸. 백업하는데 진이 다 빠지고.

 

부품이 입고 되어 지니어스바 방문. 혹시 몰라 테크니션과 재확인. 저 타임머신 복구할 거라 쓰던 OS 깔아 달라고 했는데 잘 전달된 거죠? 이후로 다시 테크니션과 돌림노래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앗. 순간 깨달았다. 서로가 다른 전제에서 대화하고 있었단 것을. 

 

테크니션은 데이터 유실 상황이라는 '만약의 사태를 강조'해서 말한 거고 듣는 나는 탑케이스 교체하는 데 만약을 위해 '데이터를 밀고 수리'한다고 인지를 해버려서 아니 왜? 하드웨어가 그대로인데 데이터를 밀어야 하는가, 이 상태로 서로 질문과 답변을 끈질기고 성실하게 이어갔던 것. 나의 두뇌여....전두엽이여....

 

 

 


친절한 테크니션 덕분에 알게 된 몇 가지

 

 

 

① 디스플레이 고무 패킹이 파손(?)된다.

내 맥북도 그렇다는 것이다. 네???? 그래서 보니 정말로 카메라 위 고무 부분이 헐었다. 이게 무슨??? 어떻게 이럴 수 있냐니까 원래 그렇단다.... 이 부위가 열고 닫는 것 때문에 특히 잘 손상된다고 한다. 여는 시범을 보여줬는데 아니 노트북 열고 닫는 데 이렇게까지 노력을 해야 하다니. 예전 맥북은 이런 일 없었는데 1.

 

② 카메라 막는 용도는 최대한 얇은 것으로 해라.

난 조오금 도톰한 고양이 스티커로 카메라 렌즈를 막았는데 테크니션 왈, 이게 두께가 있으면 열고 닫다가 하중 문제로 디스플레이가 깨질 수 있단다. 세로로 쫙. 네???? 실제로 이런 수리가 들어온다고. 핫..... 스티커 떼거나, 카메라 막을 거면 최대한 얇은 것으로 부착. 예전 맥북은 이런 일 없었는데 2.

 

③ 키보드 각인이 벗겨진다.

할 말이 없다. 한 개지만 정말 벗겨졌다. 내 평생 개인, 회사 컴 쓰면서 각인 벗겨지는 키보드는 본 적이 없다(학교 델 컴퓨터는 그랬던 것 같기도). 맥북 프로 키보드가 벗겨진다? 실제로 수리 들어온다고. 하아... 예전 맥북은 이런 일 없었는데 3.

 

 

저 얘기를 듣고 있으니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 비싸긴 해도 물리적 손상이 없는 한 오래 쓰는 노트북이 맥북 아니었나. 언제 이렇게 병약의 아이콘이 되었나. 10년도 더 지난 맥북 프로에 가상 머신으로 윈도우 깔고 올 초에도 잘만 썼는데. 꺼내 보니 고무 패킹도, 키보드 각인도 아주 멀쩡하다. 

 

 

몇 년 전 스노 레오파드로 초기화했을 때 찍은 맥북 프로 2010, 디스플레이 무광 커스텀. 맥북 프로 2019는 화면이 너무 비쳐서 찍기를 포기.

 

 

 

품질 프로그램으로 한 번에 해결됐지만 이 답답함은 뭘까. 하여튼 새옷 갈아입고 온 맥북 프로 2019 15인치. 

 

옆면과 터치바에 보호 테이프도 붙여서 준다. 

 

 

 

 

 

3. 배터리 사이클 1

터치 아이디와 트랙 패드 제외하고 전면 교체된 후. 만약의 사태는 없었다. 쓰던 상태 그대로 복귀. 키보드가 깨끗해져서 보기 좋구나. 키감이 부드러워지고 소음은 확실히 줄었다. 4세대 나비식이 마지막으로 알고 있는데 뭐가 달라진 건지. 느낌적인 느낌일 뿐인가. 각인 벗겨질까 두렵긴 한데 나름 새 노트북으로 부활해서 좋긴 하다. 배터리 사이클은 1이다. 부품 90일, 배터리 1년 보증 다시 들어간다. 이전 녀석만큼 장수해야 하는데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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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열쇠의 계절

고교 2학년 도서위원인 호리카와 지로와 마쓰쿠라 시몬이 활약하는 일상 추리+학원물이랄까. 시시껄렁한 일로 심각해하고 투닥투닥하는 게 귀엽다. 파슬리 콜라를 서로 먹이려고 하는데 아, 저 때는 저렇지, 저런 거 없어도 만들어서라도 (골려) 먹일 때지, 하며 술술 읽어가다,
왠지 모를 울컥함에 마지막 페이지를 한참이나 보았다. 작가의 대표작을 안 본 상태인데 요네자와 호노부의 필치가 어떨지 감이 온다면 너무 설레발일까.

 

책과 열쇠의 계절

고등학교 도서실을 배경으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일상 미스터리. 호리카와와 마쓰쿠라가 2학년이 되어 학교 도서실 도서위원이 되면서 함께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을 담고 있다. 모두 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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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소크라테스
단편집이다. 표제작이자 첫 작품 ≪거꾸로 소크라테스≫가 <책과 열쇠의 계절>과 묘하게 맞닿는 부분이 있다. 마쓰쿠라 프리퀄(+시퀄)인가 싶을 정도로. 아직 읽는 중인데 첫 번째 이후로 이상하게 잘 안 읽힌다. 거꾸로 책인가.

 

거꾸로 소크라테스

어린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다섯 편의 이야기를 모은 단편집이다. 각각의 제목은 ‘거꾸로’ ‘반대로’ ‘아니다’ ‘않다’ 등 부정적인 의미이지만, 들여다보면 주인공들의 순수함과 재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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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사람 나를 죽인 사람
청춘의 비분강개를 담은 특유의 문체와 페이소스가 돋보인다. 전작 <류>와 세계관을 공유하는 만큼 빛과 어둠의 서사가 더욱 강렬하다. 작가의 이력이 배어나는 경계인의 정체성도 여전하다. 사건이 아닌 정서의 환기에 집중하는, 대만의 끈적한 여름밤이 떠오르는 소설.

 

내가 죽인 사람 나를 죽인 사람

나오키상 수상작가 히가시야마 아키라 첫 한국어판 장편소설. 최고의 찬사를 받은 《류》가 나오고 2년 만에 발표한 이 소설은, 어린 시절 참혹한 사건에 휘말린 네 명의 소년이 성인이 되어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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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명의 술래잡기
미쓰다 신조는 한 권 정도는 읽어야지, 하면서 내내 안 읽고 있었다. 미스터리는 좋은데 호러는 싫다. 특히 일본 작품.
너무 더워 짜증 나던 어느 날, <일곱 명의 술래잡기>를 읽어 버렸다. 더위를 잊어야 한다! 궁금해서 빨리 읽고 싶었지만 마지막 전개가 두려워 되도록 낮에 읽었다.... 다행히 귀신 이야기(?)는 아니었다. 서사는 사실 슴슴하고 공포 요소도 클리셰에 가까운데 종장을 향해가는 으스스한 기운만큼은 흥미진진. 노파와 고이치의 대화는 묘하게 코믹하기도. 이 정도 공포라면 나도 읽을만하다. 근데 며칠 전 한밤중에 깼는데 갑자기 소설 속 술래잡기 — 정확히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가 떠올랐다. 😑 어우. 술래가 아이들 세는 장면을 생각하다 잠들어버렸지만. 그만큼 재밌게 읽은 것이라 생각해야지.
신조 작품 중 뭘 골라야 적당한 스릴로 이 계절을 즐길 수 있으려나. 모 독서플랫폼에 의하면 취향 일치도에서 <마가>, <노조키메> 순으로 높던데 믿어도 되는 건지. <잘린 머리>는 언젠가 읽을 거고. 아, 세이시의 <옥문도> 엄청 재밌게 읽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 다시 읽어 볼까. 무서워도 탐정(역할)이 나오는 게 좋은데.

 

[전자책] 일곱 명의 술래잡기

민속학과 괴담, 미스터리가 결합된 특유의 복잡하면서도 독특한 세계관과 인물, 정교한 트릭으로 매 작품마다 독자들을 놀라게 했던 미쓰다 신조. 그가 이번에는 기존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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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성술 살인사건
2년쯤 전인가? 전면 개정판이 나왔을 때부터 읽고 싶었다. 엄청난 트릭이 대체 뭘까. 하지만 소재에 걸맞게 토막 살인+오컬트의 무시무시한 내용이라고 해서 마음을 다지는 데 어언...
다행히 묘사가 구체적이지 않아서 생각보다 참혹하진 않다. 명성대로 트릭 설계가 세심하고 이를 위한 점성술 서사도 탄탄하다. 하지만 40년 간의 난제까지는... 드러나는 전모와 범죄 동기, 트릭의 실마리가 얼렁뚱땅 개연성이 떨어져 아쉽지만, 1980년 본격의 부활을 알리고 작가가 최근 전면 개정을 낸 만큼 공들인 작품이다. 여기에 독자로서 지적 유희에 동참하는 즐거움이 있다.

 

점성술 살인사건

일본 미스터리 역사에 분기점이 된 걸작 《점성술 살인사건》이 국내 첫 출간 이후 14년 만에 완전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개정판은 고단샤에서 출간된 《시마다 소지 전집 1》에 실린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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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세계사

TTS로 오며 가며, 이일 저일 사이 듣는 킬링타임용으로 골랐다. 대기근 때 아일랜드인이 이주한 비영어권 국가 중 최대 규모가 아르헨티나라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세계에서도 아일랜드인이 이주한 나라로 다섯 손가락에 든다고 한다.

 

[전자책] 미스터리 세계사 : 세상을 뒤흔든 역사 속 28가지 스캔들

잔다르크는 화형을 당하지 않고 결혼까지 했다? 클레오파트라 7세가 독사에 물려 죽은 것이 아니다? 기자 대피라미드는 이집트인이 지었을까, 유대인이 지었을까? 이 책은 세상을 뒤흔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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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
가톨릭 신앙에 서스펜스와 미스터리가 적당히 어우러져 술술 읽힌다. 얼개는 단순하다. 콘클라베를 구성하고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것. 세계 각지에서 모인 118명의 추기경이 기도하고 아침 먹고 투표하고 개표하고 기도하고 저녁 먹고 기도하고 자고 일어나서 기도하고 먹고 투표하고 개표하고를 반복하는 사이사이 감찰과 고발, 시치미, 반목, 모략이 펼쳐진다. 염탐과 술수라고 해봤자 노구의 성직자들이라 별 거 없다. 대화와 간구, 그리고 기도하기. 이게 스릴러인가 싶지만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큼 콘클라베는 온갖 이슈로 부글댄다. 급기야 테러까지 발생. 지상 교회의 최고 자리는 누구에게 갈 것인가.
인노켄티우스(인노첸시오)는 십자군 때 이런 교황이 있었지, 정도밖에 모른다. 오랜 세월 이 이름의 교황이 없기도 하고, (우리말 기준으로) 어감 때문인지 켄타우로스가 떠오르면서 왠지 모를 이방의 기운이 느껴진다.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 같은.

 

콘클라베

<폼페이>, <유령 작가> 작가 로버트 해리스의 장편소설. 이번 작품은 로버트 해리스에게 있어 새로운 시도이자 변화라 할 수 있다. 스릴러를 지향하지만 결코 폭력적이지 않고, 종교의 역사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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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노트북의 계절
난데없는 노트북 배터리 팽창으로 절망에 빠졌다. 보증기간이 지난 이때 하필. 홈페이지에서 알아본 배터리 교체 비용 때문에 다시 절망. 애플에 전화해봐도 보증이 지나서 뾰족한 수가 없다는 답변. 그렇다고 자가 수리에 도전하자니 좀 망설여진다. 근처에 애플 매장이 있으니 일단 가 보자. 

지니어스바에서 점검을 받는데 배터리 문제는 잡히지 않았다. 근데 4년 보증의 키보드 품질 프로그램에 들어가 탑케이스 무상 교체가 가능하단다! 난 내가 오타를 잘 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게다가 각인도 벗겨진 참이었다. 눈물이 날 뻔했다.

노트북 환골탈태의 계절이다. 

 

 

 

🎬 #1

스파이에게는 조국이 없다


 

가장 깊은 9번째 지옥 4번째 구덩이 '주데카'에는 배신자들이 있다. '유다의 나라'라는 이름대로 이곳에서 가룟 사람 유다, 마르쿠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지상의 교회와 제국을 배반한 죄로 지옥의 최고 권력자 루시퍼에게 물어뜯기는 중이다.

 

 

단테 <신곡> 『지옥편』 제34곡, 귀스타브 도레 그림. 머리 하나에 얼굴이 셋인 악마 대왕이 죄인 3방을 씹고 있다.

 

 

 

E. M. 포스터는 1938년* 에세이에 이렇게 썼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조국 로마가 아닌 친구 카이사르를 배신했기 때문에 지옥 제일 밑바닥으로 보내졌으며 단테에게 이는 당연한 일이다. 현대의 독자는 분개할 테지만, "친구와 조국 중 한쪽을 배신해야 한다면 조국을 배반할 용기를 원한다." 포스터의 이 말로 영드 친구라는 이름의 가면은 시작한다.

*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1년 전이며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

 

 

 

닉 엘리엇과 킴 필비는 MI6 동료이자 오랜 친구다. 하지만 KGB 이중첩자였던 필비가 베이루트에서 소련으로 망명하자 엘리엇은 필비를 도와줬다는 혐의를 받는다. MI5 조사관 릴리 토마스가 엘리엇을 조사하고 CIA 방첩 책임자 짐 앵글턴 역시 이 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친구라는 이름의 가면>은 벤 매킨타이어의 베스트셀러 소설 <A Spy Among Friends>가 원작이다

 

냉철함과 위트 속에 꾹꾹 눌러 담은 엘리엇의 비애.
검붉고 버석한 낙엽처럼 모스크바를 나뒹구는 필비의 고뇌.
곰팡이 핀 지하 골방을 성역으로 삼은 앵글턴의 믿음.
적과 친구의 이면을 파헤치는 토마스의 신념.
무조의 브라스 선율이 더해져 드라마는 무겁지만 매서운 간장감을 내뿜는다.​

 

 

 

역사에 제대로 이름을 남긴 이중간첩 해럴드 에이드리언 러셀 "킴" 필비. 엘리트 집안 출신인 그는 돈 때문에 기밀을 넘긴 것이 아니었다. 케임브리지 시절의 치기는 집어치우라는 엘리엇에게 필비는 1934년 2월 빈 노동자 반란을 겪고 자신의 '진짜' 신념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야."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엘리트 첩보원에게는 어떨까.

 

지리학자이자 외교관, 정보원이었던 필비의 아버지 존 필비는 아랍을 배신한 영국에 환멸을 느끼고 이슬람교로 개종까지 한 인물이다. 드라마는 필비가 영국을 '미워'하는 데 이러한 배경이 있음을 내비친다. 필비에게 영국은 조국이 아니었다. 망명 후 소련 여권과 적기훈장을 손에 쥐었지만 마멀레이드와 크리켓, 타임스 십자 낱말 풀이 등 '사소한' 향수도 놓지 못한다. KGB 스파이면서 소련인은 되고 싶지 않은 사람. 킴 필비, 그에게는 배반할 조국이 없었다. 스파이 시절도 끝났다. 하지만 그리워 할 어떤 것은 있었다.

 

 

 

 

 

🎬 #2

친구 : 첩보원을 뜻하는 은어. 특히 MI6 요원을 지칭하는데 쓰임

국제 스파이 박물관


 

베이루트 있는 필비가 KGB 정보원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나오자 필비를 신문하기 위해 누가 베이루트로 갈 것인가를 두고 MI6와 MI5가 신경전을 벌인다. 결국 MI6인 엘리엇이 베이루트로 가 극비리에 필비를 만난다. 그리고 필비는 모스크바로 망명한다. MI5 요원 토마스는 엘리엇이 필비를 일부러 놔 준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두 정보기관의 알력 역시 불거진다.

 

당시 MI6는 상류층 엘리트 클럽 old boy network의 중심이었다. 남다른 유대감과 뿌리 깊은 우월감은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요인이었다. 때문에 조직 내 이중간첩이 있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배신 이전에 이너 서클의 '친구들' 등에 칼을 꽂는 행위였다.

 

 

필비의 진짜 죄는 평민 나부랭이들이, 거기에 여자가 조직을 들쑤실 여지를 제공한 데 있죠.

 

 

 

MI5 방첩팀에 여성 요원들이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MI6에 자기 사무실이 있는 여성은 보이지 않는다.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4개국어에 능통하고 분당 110타를 치는 재능 있는 인재로 네덜란드 작전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직책은 엘리엇의 비서였다.

 

같은 대의를 위해 일하면서 서로 다른 조직에서 친구인지 적인지 신경전을 벌이는 엘리엇과 토마스. 또 다른 엘리트 스파이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우주 경쟁이 궤도에 오르고 세상은 변하고 있다. 엘리엇은 반문(이자 자문)한다. "뉴캐슬 출신 여성이 우리를 바꾼다?"

 

소련 공장 노동자였던 발렌티나 테레시코바가 우주에서 지구로 보내는 메시지가 TV 화면으로 전해진다. "지구는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테레시코바는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다. MI6 시설 관리 책임자는 사람을 우주로 보내는 때에 사무실 문짝은 내려앉기 일쑤라고 불평한다. 문이 열린다. 힘껏 밀쳐야 하지만.

 

친구 대신 조국을 배반할 용기를 원한다는 E. M. 포스터는 엘리트 계층을 지지했지만, 그가 정의하는 엘리트의 기준은 사회적 지위나 영향력이 아닌 명민하고, 사려 깊고, 용감한 자질에 있다. 포스터는 영웅주의를 배격했다. 엘리엇과 '친구'가 되는 토마스는 이런 관점을 드러내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릴리 토마스는 드라마 오리지널 캐릭터다.

 

 

 

 

 

🎬 #3

너와 나, 피땀 흘려


 

그들이 못을 박을 때 그는 울지 않았다
뜨거운 피가 콸콸 솟구쳤다
붉게 물든 하늘에서 개들이 짖어 댔다
그러나 그는 울지 않았다


그 멋진 친구는 사람의 주인이었고
바람과 바다의 친구였다
그 훌륭한 친구가 우리 손에 죽었다 믿는 자들은
구제 못 할 바보들이다

 


<훌륭한 친구의 발라드> 중에서

 

 

 

 

진주만 공습 다음 날, 필비와 앵글턴은 처음 만난다.

 

"짐 앨글턴 입니다."
"...아, 그 시인?"

 

앵글턴을 시인이라고 부르며 예일대 문예지 『퓨리오소』를 읽었다는 필비의 칭찬에 수줍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앵글턴. CIA 요원의 마음이 순식간에 열린 순간이다. 공동의 대의, 그리고 시를 통한 유대로 MI6 엘리트 첩보원과 CIA 방첩 책임자의 우정은 깊어만 간다. 어느 날 필비는 앵글턴에게 에즈라 파운드의 시집을 건넨다.

 

 

🎞

"너와 나 두 사람이 서로만을 의지해 서방 세계를 지켜야 할 때 쓰자."

 

 

 

 

드라마만의 창작인 듯한데 필비가 파운드의, 예수의 죽음에 관한 시를 암호로 쓴 건 꽤나 의미심장하다.

 

'이미지즘'을 개척하여 20세기 현대시의 선두에 섰던 에즈라 파운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무솔리니를 지지하는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미국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참전했다고 비난했다. 파운드는 종전 후 전범으로 기소되는데 사형 대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손을 쓴 이가 앵글턴이다. 파운드는 T. S. 엘리엇, 어니스트 헤밍웨이, 로버트 프로스트 등의 탄원으로 12년 만에 정신병원을 나와 이탈리아에서 여생을 마쳤다.

 

파운드는 시인들의 시인이었지만 파시즘에 동조한 흑역사가 있다. 이탈리아에서 체포 당시 찍은 머그샷.

 

 

 

예일에서 시학과 신비평, 기호학을 공부한 제임스 지저스 앵글턴은 대학 문예지 필진으로 활동하며 T.S. 엘리엇, 에즈라 파운드와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파운드를 만난 적도 있다. (드라마에서는 둘을 '친구'로 설정.)

 

1963년 소련 망명 후 KGB 수뇌부와 인터뷰를 갖는 필비. 앵글턴에 대해 시인으로는 형편없지만 이면을 꿰뚫어 보는 뛰어난 첩보원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꿰뚫어 보지는 못했지만.

 

​시인의 감수성은 앵글턴에게 타인이 쓴 미묘한 껍질을 볼 수 있게 했다. 그것이 모두 허상임을 알게 되자 감수성은 양날의 비수가 되었다. 필비 사건 이후 앵글턴은 CIA 내 이중간첩 색출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그의 병적인 집착은 내부 반발을 사 결국 파면으로 이어졌다.

 

앵글턴은 두더지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CIA 요원들을 불법 도청하고 마구잡이로 혐의를 씌웠다. 미국으로 전향한 KGB 요원 유리 노센코를 의심하여 창문도 없는 골방에 감금해 버리기도 했다. 그것도 3년이 넘도록. 강박적인 집착에 혀를 내두르다가도 필비가 그에게 어떤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한편 씁쓸하기도. 두더지, 두더지 잡는 여우, 여우를 부리는 사냥꾼이 물고 물리는 게임을 벌이던 때. 어떤 신념으로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1951년 MI6의 버지스가 꼬리를 밟혀 소련으로 탈출했다. 측근인 필비 역시 의심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이때 엘리엇은 필비가 관련됐다 하더라도 그것은 명백한 '실수'라고 두둔했다. 옵서버 신문의 베이루트 특파원 자리를 주선한 것도 엘리엇이었다. 필비는 '정직하고 명민한' 사람이고 버지스에게 감쪽같이 속은 것이지 배신자가 아니라고 앵글턴은 판단했다.

 

​슬프게도 앵글턴의 판단은 틀렸다. 이념을 공유하고 함께 시를 읊던 친구, 우정 이상으로 숭배하던 친구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흔을 남겼다. 엘리엇은 친구 필비를 믿(고싶)었지만, 1951년 이후 어느 시점부터 정보원 필비는 수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마치 예수가 유다의 배신을 예견한 것처럼.

 

단테는 은인을 저버린 자들이 '유다의 나라'에 간다고 했다. 공화국을 위해 친구를 배신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유다와 함께 여기에 있다. 카시우스이며 브루투스이고 유다였던 킴 필비. 단테가 필비를 알았다면 지옥 가장 밑바닥에는 얼굴 셋이 아닌, 넷 달린 악마가 있었을까.

 

 

 

 

슬픔의 나라로 가고자 하는 자, 나를 거쳐가거라.
영원한 가책을 만나고자 하는 자, 나를 거쳐가거라.
파멸한 사람들에게 끼이고자 하는 자, 나를 거쳐가거라.


나를 거쳐 가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리라.

 

단테 <신곡>『지옥편』제3곡 지옥의 문에 새겨진 글귀

 

 

 

 

 

 


릴리 토마스는 여러 실존 인물을 참고한 가상의 캐릭터다. 그중 한 명이 작중 토마스의 상사로 나오는 제인 시스모어. 주급 30실링에 MI5 사무원(타자원)으로 입사했지만 두각을 드러내며 첫 여성 MI5 요원으로 대 소련 방첩 업무를 전담했다. MI6에서도 잠시 근무했는데 당시 상사였던 필비는 시스모어의 영민함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업무에서 은근히 배제했다. 자신의 정체를 간파당할까 우려해서다. MI5로 돌아간 시스모어는 버지스와 맥클린이 소련으로 망명하자 필비의 과거 행적을 낱낱이 조사했고 이 보고서는 필비가 MI6에서 사임하기에 충분했다.

 

본래 이름은 캐서린 마리아 마거릿 시스모어지만 제인 시스모어로 잘 알려졌다. 결혼 후 성인 제인 아처로 불리기도 한다.

 

 

 

 


연기파 배우들이 총출동해서 구멍이 없다(강아지까지 연기를 잘해). 캐릭터 하나하나 인상적인 장면이 많지만 그중 내가 꼽는

강렬한 장면 : 3화 그러나 그는 울지 않았다

마지막, 교차 편집으로 잡는 필비-앵글턴 신. 한치의 미동도, 표정 변화도 없이 만감을 드러내는 가이 피어스의 연기가 압권이다. 이 외에도 배우로서 가이 피어스의 존재감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좋아하는 장면 : 5화 토마스가 케첩을 뿌리다
작은 상황으로 토마스-엘리엇의 배경, 사고방식, 성격 차이는 물론 관계 변화를 함축적으로 표현. 필비와 엘리엇의 첫 만남, 악수 장면이 떠오르면서 묘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옛 친구가 떠나면 새로운 친구가 오는 것이 순리인지도. 

 

 

 

Drama stills : ITVX/Sony Pictures

Others :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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