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프레스티지 — 사라지는 것들에 관하여

크리스토퍼 놀란의 2000년대 작품을 좋아한다.

<메멘토>, <인썸니아> 같은. 배트맨 시리즈는 열외로 하고, <인셉션>은 놀라웠지만 개인적으로 전작들보다 감흥이 덜했고 <인터스텔라>는 별로였다. <덩케르크>는 흥미롭게 봤고 <테넷>은 봐야지 하는 게 2년이 훌쩍 흘렀다. 7월 개봉하는 <오펜하이머>는 어떨는지.

 

한 감독의 최고작과 관객의 최애작은 다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프레스티지>는 후자다. 서너 번은 보지 않았을까.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언급도 잘 안되고 평도 그저 그런 영화지만, <프레스티지>를 정말 좋아한다

 

개봉 때는 다 이해하지 않고 본 것 같다. 당시 과학자 테슬라를 알지도 못했고, 신비주의자(?)에 약간 매드 사이언티스트 정도로만 알아서... 데이비드 보위가 역할을 맡은 탓도 있다. 내게 보위는 과학자 느낌이라곤 없으니까(영원한 지기 스타더스트). 놀란은 테슬라 역으로 보위 이외엔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생각하면 이유를 알 것 같기도(역시 지기 스타더스트).

 

2006년 영화이니 화려한 CG가 익은 눈에 테슬라 코일은 다소 조악해 보이고, 앤지어의 마지막 — 할 말은 하고 죽겠다는 의지 — 도 작위적이고 투박하달까. 보든의 '프레스티지'야 말할 것도 없고. 곳곳에 심어 둔 복선과 시각적 은유는 보기에 따라서 세련되지 못한, 과욕으로 비칠 수 있다. 그래도 <프레스티지>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요소를 갖췄다. 끝나고 나서야 더 절묘해지는 구성, 여러 층위의 메시지, 배우들의 연기, 소품, 의상. 시대 배경까지

 

 

 

 

프레스티지

화려한 마술 뒤에 숨겨진 충격적인 결말세기의 전환을 맞아 격동적인 변화가 일던 1900년대 말 런던은 최고 상류층에서 마술사가 태어났고 사회에 마술이 널리 퍼져있던 시대이다.로버트 앤지어(휴 잭맨)는 상류층 집안에서 자란 쇼맨십이 강한 마술사. 반면 고아로 자라 거친 성격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알프레드 보든(크리스찬 베일)은 자신의 마술 아이디어를 남들에게 보여 줄 배짱은 없지만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이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그 무엇도 믿지 마라 당신이 생각하는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니다두 사람은 서로를 아끼는 친구이자 최고의 마술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선의의 경쟁자. 그러나 그들이 최고라 자부했던 수중마술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로버트는 아내 마저 잃고 두 사람은 철천지원수로 돌변한다. 어느 날, 알프레드가 마술의 최고 단계인 순간이동 마술을 선보이고 질투심에 불탄 로버트 역시 순간이동 마술을 완성한다. 상대방 마술의 비밀을 캐내려 경쟁을 벌이면서 주변 사람들의 생명마저 위태롭게 만든다.목숨을 건 위험한 대결의 끝에 신의 경지에 도달한 놀라운 마술의 세계가 펼쳐진다로버트는 알프레드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자신의 조수이자 사랑하는 여인 올리비아(스칼렛 요한슨)를 알프레드에게 접근하게 만든다. 올리비아는 로버트를 사랑하는 마음에 로버트의 라이벌인 알프레드와 생활하게 되고, 점점 그에게 빠져든다.그들의 위험한 경쟁은 멈출 줄을 모르고 이제 서로를 죽이려고 까지 하는데…그리고 점점 밝혀지는 진실!그들의 마술, 그들의 관계, 그들의 인생에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평점

8.0 (2006.11.02 개봉)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휴 잭맨, 크리스찬 베일, 마이클 케인, 파이퍼 페라보, 레베카 홀, 스칼렛 요한슨, 사만다 마허린, 데이비드 보위, 앤디 서키스, 다니엘 데이비스, 짐 핍독, 크리스토퍼 님, 마크 라이언, 로저 리스, 제이미 해리스, 에즈라 버징턴, 에드워드 히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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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에포크의 빛과 그림자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19세기. 문화적으로 소비하는 데 이만큼 다채로운 시기가 있을까. 인간의 기원이 밝혀지고 신이 죽고 공산주의 유령이 출몰하고 혁명의 기운이 퍼져나가는 가운데 제국주의는 고개를 쳐들고 자연주의 문학은 메스를 들이대고 사진술이 성행하면서 미술은 고유의 영역으로 탄생한다. ​

 

1837년 6월 20일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이 등극하며 새 시대가 열린다. 빅토리아 시대는 억눌려 있으면서 그만큼 에너지가 폭발한다. 엄숙주의와 더불어 허영과 위선이 넘치는 때. 과학과 산업의 발달, 별별 상상과 지적 모험, 종교와 오컬트의 난립, 세계 여행과 오락의 성행, 광고의 홍수.

 

영국의 해는 지지 않았지만 그래서 해가 뜨지 않는 곳이 있었다. 지난 세기 벨 에포크는 오늘을 비추는 렌즈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만큼의 거리에서 두 마술사가 서로를 비춘다. 그 사이에서 과학자는 마법의 삼각형을 이룬다.

 

마술사와 쇼맨, 그리고 과학자. 이 기묘한 혼성은 빅토리아 시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엔진으로 세상 만물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 엔진의 자리는 이제 0과 1이 차지했다. 0과 1로 모든 것이 마술처럼 만들어진다. 그리고 마술의 광휘 속에 사라지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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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 days, it's not true. Today you don't mean it. Maybe today you're more in love with magic than me.
It's alright. I like being able to tell the difference - it makes the days it is true mean something. 

— SARAH

 

 

앤지어는 관객을 다룰 줄 아는 쇼맨이었지만 보든은 마술 자체에 미쳐있었다. 아내인 새라보다 마술을 더 사랑하는 날이 있었으니까. 새라는 보든이 솔직하길 바랐다. 그날의 보든은 (아마도 처음으로) 진실했다. "오늘은 아니야." 새라는 잘 보는 사람이다. 특별한 날들은 사라졌다. 세계에 일어난 균열은 끝내 무너져 버렸다. 보든이 거짓말을 했다고 결과가 달라졌을까. 새라의 죽음은 필연이다. 마술사의 새는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2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술쇼의 열기가 한창인 19세기 말 런던. 순간 이동 마술로 명성을 떨치던 '위대한 단톤' 로버트 앤지어가 공연 도중 살해된다. '프로페서' 알프레드 보든이 현장에서 체포된다. 한때 동료였던 앤지어와 보든은 도를 넘는 경쟁으로 원수지간이 된 지 오래. 수감된 보든은 앤지어의 일기를 건내 받아 읽던 중 찜찜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어느 날 앤지어가 버젓이 면회를 오는 게 아닌가.

 

순간 이동 마술로 먼저 이름을 알린 쪽은 보든이다. 고무공을 바닥에 튕기고 문으로 들어간다. 통- 통- 다른 쪽 문이 열리고 공을 잡는다. 탁. 관객들은 환호는커녕 마법에 홀린 듯 박수도 제대로 치지 못한다. 앤지어마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트릭. 엔지니어인 커터는 대역을 쓴, 단순한 트릭이라고 말하지만 앤지어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 저런 고급 마술이 그리 단순할 리가. 내 아내를 죽게 한 녀석. 트릭을 밝혀내서 나락으로 떨어뜨리리라. 앤지어는 보든의 조수 팔론을 납치해 생매장해 버린다. 허겁지겁 달려온 보든은 '테슬라'라는 답을 건넨다. ​

 

너무 단순하다는 것. 세상은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한 일투성이다. 과학의 시대를 지배하는 것 역시 0과 1 두 숫자뿐이다. 그 사이에서 무수한 경계가 열린다. 우연과 불신. 앤지어의 불신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프레스티지를 만들어 냈다. 보든은 팔론을 구하기 위해 테슬라라는 그럴듯한 미끼를 던졌을 뿐인데.

 

현실에서 1+1=2이지만 마술의 세계에서 1+1=1 이여야 한다. 보든이 반쪽짜리 삶을 살고 앤지어가 99번을 죽은 이유다. 데이터 세상이 그러하듯 마술의 세계에서 2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의 거울인 앤지어와 보든도 마찬가지다.

 

아브라카다브라.

(100-99)-1=1

 

최후의 주문. 완전한 프레스티지의 실현. 더 이상 트릭은 없다.

마술사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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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devotion to his art. Utter self-sacrifice. It's the only way to escape this.

— BORDEN

 

 

마술을 '아트'라고 표현한 건 (내 기억엔, 그래서 부정확하지만) 보든뿐이다. 여기서 아트는 기술적인 면을 포함하는 행위의 총체일 것이다. 단순하고, 비참하고, 뻔하게 흘러가는 세상의 경계를 흔들어 놀라움을 선사하는 게 마술이다.

 

예술은 거짓입니다. 하지만 이 거짓은 우리로 하여금 진실을 보게 하는 거짓인 거죠. 예술이 거짓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진실을 볼 수 있는 겁니다. 허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 <미하엘 엔데의 글쓰기> 중에서

 

그렇다면 마(예)술은 어떻게 현실이 되는가. 앤지어는 자신의 마술은 '과학'이라고 했다. 커터는 앤지어의 기계를 고안한 이는 마술사가 아닌 '마법사'라고 증언한다. 마술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사람, 세상의 경계를 흔드는 것이 아닌 새로 그리는 사람. 그렇다면 <프레스티지는>는 예술의 본질, 그리고 테슬라에 관한 영화라는 데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마법사의 주문

이제는 전기차 회사명으로 유명한 테슬라. 내 꼬꼬마 시절만 해도 에디슨 위인전은 널렸어도 테슬라는 듣도 보도 못했기에 성년이 되고도 테슬라하면 은둔 광인(狂人)에 가까운 이미지가 있었다. 실제로 그는 광인(光人)이었다. 빛과 함께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하니. 당시 대중적인 유명세는 에디슨에 밀렸지만, 천재적인 선견지명으로 오늘날 혁신의 아이콘으로 자리한다. 말년에는 은둔의 삶을 살다 뉴욕의 호텔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점 때문에 신비한 이미지가 더해졌다.

 

 

들립니까, 톰 소령? 회로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들립니까, 톰 소령?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로 떠나기 직전, 톰 소령은 벌써 달을 지나쳐 갔다. “지구는 푸른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노래하며. 지상 관제소와 수신은 끊긴(혹은 끊어버린)다. 그렇게 영원히 우주를 유영하는 톰 소령.

 

≪Space Oddity≫의 주인공 '톰 소령'은 데이비드 보위의 첫 페르소나로 이후 ≪Ashes to Ashes≫, ≪Hello Spaceboy≫, 마지막 앨범 ≪Blackstar≫에 재등장한다. 톰 소령에 이은 두 번째 페르소나이자 가장 유명한 페르소나는 화성 거미 떼를 몰고 지구에 온 '지기 스타더스트'. 외계인 록 메시아 지기는 5년 후 멸망할 지구를 위해 노래한다.

 

 

≪Space Oddity≫를 부르는 지기 스타더스트, 1972년

 

 

 

단순하고, 비참하고, 뻔한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다른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음악. 시공을 초월하는 게 아닌 경계를 없애버리는 음악은 마법이다. 놀란은 마법사 역에 일찌감치 보위를 낙점했다. 일론 머스크는 2018년 스페이스 X 팰컨 헤비 로켓에 테슬라 로드스터를 실어 우주로 쏘아 올렸다. 스타맨이 탄 로드스터에 흐르는 음악은 ≪Space Oddity≫와 ≪Life on Mars?≫.

 

톰 소령은 우주를 유영하다 검은별로 갔다. 화성에서 온 록스타 지기는 열정을 불태우고 2년이 채 안 돼 은퇴해 버렸다. 우주비행사, 스타맨 (또한 해적이고 공작인) 데이비드 보위. 그가 고향별로 돌아간 지도 일곱 해가 되었다.

 

 

데이비드 길모어 Remember That Night 투어, 런던 로열 앨버트 홀, 2006년

 

 

데이비드 길모어, 릭 라이트와 함께 ≪Arnold Layne≫을 부르는 데이비드 보위. 핑크 플로이드의 키보디스트 릭 라이트 역시 고인이 된 지 15년이 지났다. 아, 또 다른 게스트인 데이비드 크로스비도 올해 고인이 됐다.

 

 

 

마법사들은 별이 된다.

우리는 그들의 주문을 왼다.

아브라카다브라.

 

 

 

 

+ 오래된 영화라 스포일러라고 하긴 뭣하지만,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원작 소설 <프레스티지>에 따르면 '보든'의 이름 Alfred는 Albert와 Frederick을 '합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