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종의 기원 — 種. 宗. 鐘

정유정 작가에 대해 소위 ‘대세 작가’라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는, 무식자에 가까운 나. <7년의 밤>이 평이 꽤 좋았던 것으로 기억을 해서 읽어야지 하던 참이었다. 소재도 흥미롭고. 그리고 거의 1년 내내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던 <종의 기원>. 제목부터가 범상치 않다! 그렇기에 더욱 작가의 대표작 <7년의 밤>을 읽어야지 벼르던 참이었는데…

 

서점 사이트에 <종의 기원>이 메인에 늘 올라와 있는 게 무의식으로 작용했는지 <7년의 밤>이 아닌 <종의 기원>을 집어 들고 말았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기껏 다 읽고 나서야 ‘아, <7년의 밤>을 읽으려고 했었잖아’하고 깨달았으니 뇌세포가 진짜 어찌 되긴 했나 보다. 끄응. 난 정유정 작가가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위 순문학 작가인 줄 알았다(말했지 않나, 무식자라고). <종의 기원>은 굳이 말하자면 장르소설에 가깝다고 할까. 이렇게 작가를, 작품을 알아가는구나. 

 

 

 

 

나름 곡절 끝에 다 읽고 나니 왜 ‘베스트셀러’인지, '올해의 책’인지 갸우뚱하다. 어디선가 연기만 뭉게뭉게 나다 만 느낌인데. 사이코패스 중 우월한(이라는 표현이 조금 어색한데) 1%에 속하는 ‘프레데터’라는, 전대미문의 인물을 통해 악의 발현과 진화를 탐구한다는 작가의 야심 찬 의도는 기-승-전-‘프레데터’고, 추리물이 아니긴 해도 에필로그도 납득이 안 가고.

 

프롤로그는 유민-유진 형제의 첫영성체로 시작한다. 형제 세례명이라면 미카엘-라파엘이 먼저 떠오르는데 ‘미카엘-노엘’이라는 것부터 상당한 메타포다. 유진이 수영에 열중하는 것도 그렇고. 근데 1부 몇 장을 읽고부터 좀체 읽히지가 않더라. 그래서 숙숙 읽어 버렸다. 그만큼 사진을 보는 듯 공들인 수사가 별 매력이 없다. 문체도 세련됐고 표현도 감각적인데, 서사의 개연성이나 묘사가 통렬하거나 묵직하거나 박진감과는 거리가 멀고, 하다못해 그 어떤 감정의 앙금도 없이 다만 바람 빠진 듯 허탈함이 남는다. 말인즉슨 소설로써 감흥이 없다. ‘프레데터’라는 주인공도 복합적 성격장애에 배알 꼴리는 대로 일 저지르는 사이코 유형에 가깝지 한니발 렉터급의, 그야말로 1% 사이코패스는 아니지 않나(한니발 렉터는 0.1%인지도). 어쩌면 유진은 시시해 보일 만큼 내가 ‘포식자'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걸까. 그렇다고 생각하면 ‘기원’이란 단어가 외려 와닿긴 한다. 그래도 제목이 너무 거하다. TV에서 추억의 명화인 줄 알고 채널 돌렸더니 예능일 때의 기분(인데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타이틀 별로다). 

 

내가 진화심리학에, 생물학에 통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작가가 얼마나 자료 조사를 공들여서 했겠나 싶지만 왜 굳이 우월한(듯 우월하지 않은) 사이코패스여야 했을까. 기독교 토대 위에 다윈과 롬브로소식의 접근을 버무려 작가가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카인과 아벨? 스티그마? '악의 발현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제도에서 비롯되었다면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라고, 다윈의 말을 살짝 비틀어 본다면 정유정 작가가 주체로서 이해했다는 종(種)의 '기원'과 그에 따른 인간 도덕, 자유 의지는 도대체 어떤 함의를 갖는다는 것인가? 또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한다는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혼란하구만.

 

나의 첫 정유정 소설 체험은 이렇게 끝났다. 장르소설로 즐기려니 장광설에, 탐구 좀 해보려니 요란한 변죽에 맥이 풀린다. 소설이 아닌 각본이면 어떠려나. 안 그래도 소설마다 영화 판권이 팔린 작가라고 하더라. <종의 기원>도 연출이 잘 들어가면 제목처럼 범상치 않은 작품이 나올 수도. 기왕이면 아르토식 연극이면 좋겠고.

 

<7년의 밤>, 읽어봐야겠지...? 

 

 

+ PS. 

1. 제목 때문에 자꾸 다윈주의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번지는데(아무리 봐도 이게 작가의 의도는 아닌 것 같은데) 결에 더 맞는, 감각적인 제목이었으면 재밌게 읽었을 거란 생각도 든다. 부제로 썼다거나. 그냥 ‘종탑 사건’ 때문에 <종의 기원>인 건가, 라는 어이없는 생각도 해본다. (근데 이쪽이 더 타당한 거 같아. 함축적으로!)

 

2. 정신의학과 신경범죄학 석학이자 유펜 교수인 에이드리언 레인은 <폭력의 해부>에서 ‘롬브로소 프로그램’을 언급한다. 재밌는 건 레인의 뇌가 범죄자의 뇌 구조와 유사하고 실제로 힘겨운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롬브로소 프로그램은 추리 소설 <철학적 탐구>에서 묘사된 바 있는데 이 책 제목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서 따 왔고, 주인공은 롬브로소 프로그램으로 코드명 ‘비트겐슈타인’을 부여받은 잠재적 범죄자다. (제목과 플롯에 개연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