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끝까지 연기하라 — 배우가 덕후를 만났을 때

끝까지 연기하라   

로버트 고다드 (지은이), 김송현정 (옮긴이) | 검은숲 | 2013-01-22 

원제 Play To The End, 2004년

장르와 소재에 끌리기도 해서 진작부터 ebook으로 갖고 있긴 했는데 이제야 읽었다. {추리물 + 조 오튼} 조합이라니. 사실 난 오튼의 팬은 아니지만, 지독히도 암울해서 웃을 수밖에 없는 작품 세계와 여느 작품 못지 않게 극적이었던 작가의 삶은 언제나 호기심이 일게 마련 아닌가. 소설은 구들장에서 오튼의 <목구멍에 세 든 남자>가 발견되었다는 가상의 설정과, 이 공연의 막바지 투어인 브라이튼에서 벌어지는 일대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한물간 배우 토비 플러드는 <목구멍에 세 든 남자> 투어 중이다. 토비는 오튼의 일기를 늘 갖고 다니면서 읽고, 이렇게 소설은 토비와 오튼의 유사성을 연결 고리로 해서 전개된다. <땡땡의 모험> 시리즈도 등장하고('틴틴 시리즈'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 듯), 이 시리즈의 마니아인 데릭이라는 인물은 어벙한 듯하면서도 연극, 영화에 대한 통찰력이 자못 예리하다(덕후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 듯). 19세기와 20세기 플라스틱 제조 기업의 흥망성쇠와 어두운 이면, 영국 계급 사회도 엿볼 수 있다. 무자비한 자본주의 사회, 오튼식의 신랄한 풍자와 유머, 땡땡식의 모험이 브라이튼을 무대로 한데 어우러져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하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이 모든 퍼즐이 어떻게 맞춰질 것인지 자못 흥미진진하게 읽게 되었으나...

아. 영매가 웬 말인가. 흠. 그렇다면 끝까지 '연기하라'와 내용은 또 무슨 상관인가. 책은 두께에 비해 술술 읽힌다. 맥거핀(소위 떡밥)이 넘쳐나면서 나름대로 흡인력이 있긴 한데, 결국 마무리가! 통렬한 무언가를 기대했건만. 이게 작가의 의도라면 대성공이지만, 굳이 오튼의 삶과 희곡을 소재로 삼아야 했던 이유는 뭘까. 물론 맥거핀을 다 수거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마 수거했으면 또 이야기가 억지 짜 맞추기 식으로 흘러갈 우려도 있어 보인다(그만큼 던져 놓은 미끼가 너무 많다!). 토비와 오튼의 연결고리는 토비가 오튼의 희곡을 연기한다, 오튼이 <Prick Up Your Ears>를 구상하던 브라이튼 역 커피숍에서 토비도 커피를 마셨다는 (추측) 정도. 

토비는 연차가 꽤 된 배우인데도 사건 속에서 연기를 '수행'하는데 통찰이 없어도 너무 없어 뵌다. 현실에서 이런 상황과 맞닥드리면 머리가 굳어버리긴 하겠으나, 시종일관 좌충우돌하며 자신의 장기를 제대로 써먹질 못하니 이래서 '캐스팅'됐나 보다. 토비와 제니의 결말은 브라이튼이라는 배경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제니라는 인물 자체가 실은 제일 우중충하다.

<끝까지 연기하라>는 스릴러나 추리물이라기보다는 내리막길에 있는 배우가 투어 중 겪는 모험담에 가깝다. 덕후 데릭이 오튼과의 접점도 더 있어 보이고 진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그래도 영매는 아니야...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아니고). 데릭이 땡땡처럼 모험을 이어가는 시리즈가 돼도 괜찮지 않았을까. '플라스틱 인간들'도 출간하고 말이야. 이참에 영화 <Prick Up Your Ears>나 다시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