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오필리아 — 오필리아의 오필리아에 의한

아버지의 속물근성, 사랑하는 이의 냉소에 시달리다 연인에게 아버지를 잃고 정신이 나가버린 소녀. 버드나무에 화환을 걸려다 나뭇가지가 부러져 강물에 빠진 그는 발버둥은커녕 물에 몸을 내맡긴 채 노래를 부르며 죽어간다. 화환을 꼭 쥐고. <햄릿> 4막 7장에 묘사된 오필리아의 죽음이다. 거트루드 왕비가 한 편의 시처럼 전하는 이 죽음은 이후 많은 화가에게 영감을 주며 수없이 화폭으로 옮겨졌다.

외젠 들라크루아 Eugene Delacroix 1853

 

콘스탄틴 뫼니에 Constantin Meunier 1851-1905

 

앙투안 오귀스트 에르네스트 히베르 Antoine Auguste Ernest Hebert 1887

 

프리드리히 헤이저 Friedrich Heyser 1900

이중 우리에게 각인된 건 에버렛 밀레이의 작품이다. 영국 라파엘 전파를 대표하는 밀레이의 「오필리아」가 직접적인 죽음의 순간을 포착한다면 이 사조에 영향을 받은 19세기 후반 작가들 —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토마스 프랜시스 딕시, 마커스 스톤 등 — 은 한발 물러서서 물가의, 때로는 물 밖의 오필리아를 담았다.

존 에버렛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 1851-1852

 

토마스 프랜시스 딕시 Thomas Francis Dicksee 1864 / 마커스 스톤 Marcus Stone 1888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John William Waterhouse 1889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John William Waterhouse 1894

영화 <오필리아>는 밀레이의 그림을 충실히 재연하면서 시작한다.

당신은 내 이야기를 안다고 생각하겠지, 라는 오필리아의 독백은 이 화자가 우리가 익히 아는, 너무 연약해서 부서져 버린 가련한 아가씨가 아니란 걸 말해준다. 그렇다고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 류의 이야기는 아닐 테고, 여성 서사에 주목한 <오필리아>는 어떤 모습일까?

영화 속 오필리아는 당차고 똑 뿌러진 여성이다. 그가 관습적인 인물이 아니란 건 땟국물 줄줄 흐르는, 선머슴 같은 어린 시절부터 알 수 있다. 보석 같은 재기를 지닌 꼬마 오필리아는 거트루드 왕비의 눈에 들어 궁중 생활을 시작한다.

햄릿이라는 인물의 특성과 고뇌는 과감하게 가지치기 됐다. 제목이 <오필리아>인데 당연하다. 귀가 닳도록 들어 온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나,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Frailty, thy name is woman 같은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선왕 햄릿은 아내에게 냉정한 인물로 그려지고 클로디어스 왕은 잔인하고 포악한 악인의 면모가 부각된다.

선대 왕의 유령이나 햄릿이 미친 척 오필리아에게 냉소를 쏟아내는 대목은 각색에 맞게 재탄생했는데 모두 오필리아를 주체로 한다. 아예 햄릿에게 수녀원으로 ‘가자’고도 한다. 오빠 레티어스의 현실 감각까지 적당히 흡수한 오필리아는 현실의 부조리로 무너지는 햄릿과 대비를 이룬다. 미친 척을 하는 건 햄릿이 아닌 오필리아다. 거트루드 역시 자기감정에 솔직한 인물로 그려진다. 오필리아의 영특함을 알아보고 측근으로 두며 애정을 보이지만 나이 들어가는 슬픔, 아들의 빼앗긴 어머니의 질투도 숨기지 않는다. 여기에 숲 속 신묘한 여인이라는 영화만의 캐릭터가 합세하여 서사는 급물살을 탄다.

하지만 여성 서사에 주목한 <오필리아>의 신선함은 여기까지다. 예리해 보이던 오필리아의 현실 감각은 우리가 모르는 ‘감춰진’ 이야기(이순신 장군의 최후와 맞먹는)에 맞춰 피상적으로 변한다. 나오미 왓츠의 1인 2역으로 흥미로워 보이던 숲속 여인도 전형적인 클리셰로 소모된다. <햄릿>, <맥베스>, <로미오와 줄리엣>이 어지럽게 섞인 이야기와 제 페이스를 잃은 인물들로 <오필리아>는 고전을 여성 시선에서 재해석한 '영상미 좋은 영화'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사실 무엇을 재해석했는지도 모르겠다. 원작을 비틀었다고, 트렌디 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여성을 내세웠다고 고전이 재해석되는 것은 아니다.

오필리아의 주체적인 선택엔 박수를. 하지만 모두가 아는 ‘드러난’ 결말은 변함없기에 복수심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고 ‘희망’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는 오필리아의 행보는 쉬이 공감하기 힘들다. 너무 쉬워 보이기 때문이다. (타고난 포스 수저라서?) 오필리아를 통해 세상으로 던져진 한 여성의, 개인의 고뇌를 반추할 수 있는가? 또한 가정 비극이기도 한 <햄릿>이 오필리아의 시선으로 옯겨지면서 폴로니어스가 곁다리 수준으로 머문 것도 아쉽다.

꽃과 함께 저버린 비극적인 운명 때문인지 오필리아는 많은 화폭에 담겨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가련한 소녀에서 관능적인 여인, 도도한 여성, 성녀의 모습까지. 그림에서만큼은 언제나 오필리아가 주인공이었다. 작가 저마다의 예술적 접근이 어찌 되었든, 그림 속 오필리아는 우리를 죽음이라는 강렬한 순간으로 끌어들여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한다. 클레이 매카시 감독의 <오필리아>는 이 절정의 순간을 과감하게 전복한다. 그림 같은 영상으로 아름답게 담아낸 오필리아의 숨겨진 이야기. 영화 <오필리아>는 그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림의 강렬함을 넘어서는, 오필리아 만의 이야기를 보여주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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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hilia 2018

Directed by Claire McCarthy

Cast
Daisy Ridley ... Ophelia
Naomi Watts ... Gertrude / Mechtild
Clive Owen ... Claudius
Tom Felton ... Laertes
George MacKay ... Hamlet

photos: wikimedia commons

 

이야기가 묘하게 문고본 느낌이 난다 싶었는데 리사 클라인(Lisa Klein)이라는 미국 작가의 청춘 소설(판타지/로맨스)이 원작이다. 원전을 재해석한 것이 아니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