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하이-라이즈 High-Rise

얼마 전 영화 채널에서 <하이-라이즈>를 해주더라. 본지 1년은 된 것 같은데, 보고 나서 한동안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영화 속 장면이 종종 떠오르곤 했다. 석양 속 집게손가락을 닮은 빌딩, 페인트 범벅을 한 랭의 얼굴, 콘크리트 탑 꼭대기에 흰 말 등등. 몇 장면 보다가 TV는 껐지만 기왕 생각난 김에 기억을 더듬어 감상을 써 보면… 

 

<하이-라이즈>는 세련됐다. 연출도, 연기도, 사운드도 감각적으로 잘 빠졌다. J.G 발라드의 1975년 작 동명 소설이 원작인데 텍스트를 영화 문법으로 옮겼다기 보다는 콘텍스트를 시청각으로 표현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래서 거슬린다. 기괴하지만 아름다운 영상 속에 상징과 우화가 넘쳐나고 신경을 긁는 무언가가 머릿속을 너울댄다. 그렇게 열심히 보고 났더니 피로가 몰려온다. 엘리자베스 르콩트의 실험극 <House/Lights>를 DVD로 봤을 때처럼.

 

현대 미술이 이제는 미적인 관점으로만 이야기하지 않듯 영화 역시 메시지를 다루는 태도가 천차만별이다. 십수 년 전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 왜 봤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광고에 ‘홀려' 봤던 것 같다. (사실 난 심령・공포물은 안 본다. <링>도 안 봤다고!) 결국 핸드헬드의 압박으로 도중에 나와 버렸다. 웬만하면 상영 중엔 화장실도 참는 난데 견딜 수가 없더라. 상영 중간에 나간 영화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듯싶다. (아직은 그렇다. 심야에 <킹덤>도 견뎌 냈건만!) <하이-라이즈>도 중간중간 나가는 관객들이 있었는데 본의 아니게 광고에 낚인 건 아닐는지. <설국열차>의 수직 버전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하긴 <설국열차>의 '전위' 버전이라고 할 순 없었겠지. 

 

취향의 차이는 차치하고, 실험 정신으로 정서를 극한으로 몰고 간 작품 하면 생각나는 게 필립 글래스의 <사티아그라하>다. 지난한 투쟁, 무한한 영광, 끝없는 역사의 반복에 정신적으로 동참하게 되면(팔걸이를 꼭 잡고 버텨냈다!) 어느덧 그만큼의 ‘카타르시스’도 느끼게 된다. (실험대의 개구리 같은 심정이긴 했지만.)

 

<하이-라이즈>도 그 끝을 보고 나서야 속이 좀 후련하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뼈대가 있을 뿐, 이야기 전개나 인물의 심리를 속속들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대신 컬러와 조명, 사운드, 소품을 비롯한 미장센에서 읽어내야 한다. '행위'도 중요하다. 불친절하단 소리다. 그래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도 있다. 70년대 영국 판 ‘리바이어던’은 마거릿 대처로 이어지는데, 오늘날 여느 정치인을 갖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오히려 더 잘 들어맞는지도 모르겠다.

 

랭은 정신과 의사에다 허우대도 멋지다. 자연적, 도구적 권리 투쟁을 설명하는 인물에 적합하다(라고 내 마음대로 갖다 붙일 만큼). 랭의 누나 얘기가 영화에서 언급됐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개연성 없이 치닫는 혼돈 속 랭을 보고 있자니 문득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트랙 29>의 마틴이다.

 

<트랙 29>는 니콜라스 뢰그의 1988년 작으로 감독의 명성답게 컬트적인 요소로 똘똘 뭉쳐 있다. 한창 게리 올드만에 빠져 있을 때 본 영화인데 극 중 마틴을 보고 있자니 또 누군가 떠오르는 게 아닌가.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 1976년 이 사나이를 지구에 떨어트린 이도 뢰그였다. 감독 이름만으로는 선뜻 고르지 않을 것 같은 영화를 두 편이나 봤다니. 연극과 영화에서 두각을 보이며 갓 30대에 접어든 올드만이 데이비드 보위와 닮아 보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머리카락 색 마저 똑같다!) 야무지게 다문 입매가 비슷한 건가, 의외로 색이 맑은 눈동자가 닮은 건가. 기묘한 경계를 오가는 랭이 마틴과 어딘지 비슷해 보이는 건 또 나만의 갖다 붙이기인지도. 

 

그런 의미에서 언제 다시 한번 봐야겠다. 쓰고 보니 그래야겠단 생각이 든다. <하이-라이즈>는 지치는 구석이 있긴 해도 나쁜 영화는 아니다. 적어도 나에겐. 로저 이버트가 <트랙 29>을 두고 했던 말이 내가 <하이-라이즈>를 보고 느낀 그대로다. 

"[It] does not offer amusement, but it promises confusion, frustration, weirdness and the bizarre. You probably won’t like it. But it won’t disappoint you."

 

 

HIGH-RISE (2016)

Directed by Ben Wheatley

Cast

Tom Hiddleston as Dr. Robert Laing

Sienna Miller as Charlotte Melville

Jeremy Irons as Anthony Royal

Luke Evans as Richard Wilder

Elisabeth Moss as Helen Wilder

Daniel Renton Skinner as Simmons

Keeley Hawes as Ann Royal

Augustus Prew as Munrow

 

 

TRACK 29 (1988)

Directed by Nicolas Roeg

Cast

Theresa Russell as Linda Henry

Gary Oldman as Martin

Christopher Lloyd as Henry

Colleen Camp as Arlanda

Sandra Bernhard as Nurse Stein

Seymour Cassel as Dr. Fairmont

Leon Rippy as Trucker

 

image sources: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