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GE] 키신은 키신이다 — 초간단 감상기

예프게니 키신 피아노 리사이틀

2024년 11월 20일 |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

 
🎹
고음부의 청량함보다 저음부의 묵직함이 먼저 꽂히더라는.
4B 연필의 어두움과는 다른 목탄으로 꾹꾹 눌러 담는 듯한 질감.
하지만 정직한 연주에는 변함이 없다. 키신은 키신이다.  
늘 달던 높은음자리 배지가 아닌 노란 리본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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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7번 ★★★★☆

키신이 치는 베토벤이라고 확실히 외치고 있다. 완벽한 페달링. 귀신이다. 어떻게 이렇게 정직하고 유려하고 깔끔한 소리가 날 수 있는지. 노래하듯이 보다 웅변조에 가깝게 느껴지지만, 압운에 미묘한 차이를 입히는 행갈이처럼 묵직한 저음부와 살랑이는 고음부, 셈여림의 핑퐁이 돋보였다.
연주자의 지문이 확실해서 좋은 곡이 있고 아닌 곡이 있다. 음악 용어로 루바토라고 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인데 — 이건 순전히 알못인 내 느낌/표현이다 — 베토벤의 이 곡은 자기 색깔이 분명한 소콜로프, 키신의 연주가 정석의 그것 만큼 인상적이다. 소콜로프, 아슈케나지, 키신 연주 다 좋다. 사실 베토벤 음악은 웬만한 연주면 난 다 좋다. 이것이 베토벤의 힘인지, 내 막귀 덕인지 둘 다인지.

 

쇼팽 녹턴 Op. 48-2 ★★★★☆
쇼팽 환상곡 Op. 49 ★★★★★

녹턴 48-2가 자주 연주되는 곡도 아니고, 솔직히 브람스 발라드보다 위험 구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영롱한 음색에 끌려 키신의 사색의 공간 그 어딘가에 다녀온 기분(피리 부는, 아니 피아노 치는 키신).
키신의 쇼팽은 언제나 내게 직관적으로 가슴에 꽂히곤 한다. 작품을 해석하고 표현한다기보다 그 곡 자체랄까, 혹은 환기의 개념에 가깝달까. 자기가 <겨울바람> 맞으면서 만신창이가 되고, 본인이 <혁명>하러 뛰쳐나가는 식으로. 

 

크고 작은 꽃망울을 힘차게 틔우는 봄의 화원. 명료하게 어우러진 음 속에 두툼하게 들어 찬 강약의 밀도. 환상곡 단연 최고! 호옥시나 매너리즘으로 연주하는 건 아닐까 하는 내 몹쓸, 썩은 생각을 날려버린 최고의 연주. 쇼팽과 상드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다 키신의 부인이 부럽다는 (잡)생각이 순간 들고 말았다. 이런 연주를 만날 들을 거 아닌가! 여기저기서 터지는 브라보. 극 내향인인 나는 열심히 박수치며 속으로 브라보 백만 번 외침. 오늘 쇼팽의 또다른 얼굴을 만났다.

 

브람스 4개의 발라드 ★★★

3에서 4로 넘어가면서 의식이 살짝 탈출. 한 귀로 들어오는 소리가 다른 귀로 빠져나가는 경험을....... 결코 졸린 게 아니었다. 내가 브람스를 굳이 찾아 듣지 않는 알못이기 때문이겠지. 이전 곡들의 은근한 호흡은 오히려 좋았는데. 브람스는 아직 나와 인연이 아닌 것으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아직요.)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2번 ★★★★★

역시 최고! 기대한 대로 최고! 프로코피예프 특유의 귀신 흐느낌과 몽환적 울림 그 사이 지점이 정교한 타건과 리듬감으로 형체를 갖추고 빛을 발한 연주. 그래 피아노는 타악기다, 역시 키신이다, 라는 감탄만. 역시나 속으로 브라보 백만 번. 
 
 
 

앙코르는 예상대로

쇼팽 마주르카 67-4
프로코피예프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브람스 왈츠 39-15

 
너무나 짧아서 아쉬웠지만, 키신 왠지 수척해 보이고 살도 좀 빠진 것 같고, 나도 집에 가야 하니 이쯤에서 깔끔하게 끝내는 게 좋구나 싶었으나
 
사인회를 한다네? 근데 10시 반까지만 한단다. 그래서 받아보기로 했다. 극 내향 성격이라 굳이 연주자 사인을 받은 적도 없고, 게다가 키신은 줄이 항상 만리장성이라 엄두가 안 났는데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받으면 땡큐고 못 받으면 집에 일찍 귀가하니 좋고. 결국 받긴 했는데, 키신 거의 사인 기계....... 스태프까지 동원되어 마치 컨베이어 벨트처럼 진행되니 이게 뭔가 싶더라. 한 명이라도 더 해주려는 마음인 것 같아 짠하기도 하고. 초근접에서 보니 혈색이 안 좋아 보이는 건 로비 조명 탓인가. 같이 늙어가는 처지지만 괜히 안쓰럽네. 내가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니지만, 자기 방식으로 이 세상 모든 곡을 연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양반이니, 그리고 나도 그 음악을 오래도록 즐기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