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1917 — 스크린에서 만난 연극적 상상력

나무는 자란다

몇십만의 인간이 한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버렸어도, 그곳에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려 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트리고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이곳 도시에도 찾아들었다.

— 톨스토이 <부활>, 1부 1장 (민음사)

 

체리 나무를 바라보는 블레이크

 

 

블레이크가 잘린 체리 나무를 만지며 하는 말에서 <부활>의 도입부가 떠올랐다.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나무는 태초 이래 수많은 창작물에서 다양한 상징 — 상처, 치유, 성장, 부활 등등 — 으로 등장한다. <1917>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무의 다양한 모습, 수미쌍관과 대구는 두 전령, 블레이크와 스코필드의 여정을 함축한다. 이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는 해석도 있는데 욥기에도 죽음을 이야기하며

나무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잘린다 해도 움이 트고 싹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 뿌리가 땅속에서 늙는다 해도 그 그루터기가 흙 속에서 죽는다 해도 물기를 느끼면 싹이 트고 묘목처럼 가지를 뻗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어 힘없이 눕습니다. 사람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습니까? (14:7-10)

라는 구절이 있다. 높은 곳에 계신 분의 내기에서 비롯한 욥의 시련을 떠올리면 <1917>은 불가해한 전쟁의 광기에 스러져 간 이들의 이야기도 될 수 있겠다. 성경 우화는 이쯤으로 하고(이게 밑천의 전부라), 스코필드의 '성장'으로 소소한 영화 감상을 정리하려 한다.

 

하필 블레이크 옆에 있어서 졸지에 임무를 맡은 스코필드. 블레이크는 임무에 대한 동기부여가 확실하다. 형을 구해야 하니까. 스코필드는 출발할 때부터 군인으로서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독일군은 철수했다는 에린모어 장군의 말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도, 완수하기 힘든 임무란 것도 알지만, 상명하복의 부름을 받았으니 가는 것이다. 스코필드는 임무 수행에 앞서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설명하지만 형의 생사가 걸린 문제 앞에 블레이크는 그저 닥돌. 소년티가 가시지 않은 블레이크보다 전투 경험이 많은 스코필드는 프론트라인을 넘어서며 듬직한 모습도 보여준다(Age before beauty). 하지만 쥐 때문에 작동한 부비트랩으로 죽다 살아난 후 블레이크에게 왜 하필 날 데려왔냐고 성을 내고, ‘넌 모르는 게 문제’라며 쏘아붙인다. 블레이크는 ‘쥐를 죽였어야 했다’며 후회한다. 이게 복선인지 이후 도착한 농가에서 상황은 대구를 이뤄 반복된다.

 

스코필드가 참전했던 솜 전투 첫날, 영국군 5만 8천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애꿎은 병사들이 죽어 나갔고 그렇게 점령한 땅은 채 10km도 되지 않았다. 훈장의 의미를 말하는 블레이크에게 단지 철 쪼가리일 뿐이라고 냉소하는 스코필드는 생과 사에 무감해 보이지만 실은 염세적인 태도로 죽음을 두려워한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에 대한 공포, 가족을 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경험이 쌓여 생긴 불안이다. 블레이크는 아는 것이 없었고, 두려움을 몰랐고, 그래서 죽었다. 잘린 나무는 씨가 썩어 다시 움트면 더 큰 열매를 맺을 것이다.
SCHOFIELD : So, these ones all gonners?
BLAKE : Oh no, they’ll grow again when the stones rot. You’ll end up with more trees than before.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스코필드의 머릿속은 오히려 단순해진다. 매켄지 중령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블레이크의 형을 찾을 것. 편지를 전하러 가는 여정 매 순간, 스코필드 역시 '메시지'를 받는다. 대구가 상징하는 메시지는 마침내 수미쌍관 구조로 완성된다.

 

 

본향과 죽음

만신창이가 된 스코필드는 작은 통나무에 의지한 채 강물에 휩쓸려 간다. 천근만근 몸뚱이가 가라앉다 퍼뜩 정신이 든 그는 흩날리는 꽃잎을 본다. 꽃잎은 당연하게도 블레이크를 떠올리게 하는 장치. 떠다니는 꽃잎, 썩어 가는 시체 더미를 헤치고 숲에 이르자 노랫소리가 들린다. 스코필드는 자신이 보고 듣는 것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가늠하지 못한 채 숲으로 이끌려 간다. 동이 막 튼 숲에서 스코필드도 그곳의 병사들도 유령처럼 보인다. 유령. 이승의 존재도 저승의 존재도 아닌 유령. 이승을 떠났지만 저승에 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유령. 그들이 듣는 노래 <방황하는 가여운 나그네 I Am a Poor Wayfaring Stranger>는 귀향을 갈망하는 내용이다. 고된 몸 누이고 위로받을 수 있는 그곳은 바로 요단강 너머.

 

I Am a Poor Wayfaring Stranger

 

 

욥은 사람의 삶은 하루살이와 같은데도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고, 죽으면 하늘이 사라지는 한이 있어도 다시 일어날 수 없다고 한탄한다. 하루라도 편히 좀 쉬게 내버려 둘 순 없냐고 항변하면서 하느님의 분노가 멎을 때까지 무덤 속에 숨겨주고 때가 되면 다시 기억해 달라고 청한다. 욥의 시대는 부활의 개념이 있기도 전인데 인생이 얼마나 고달프면 저런 청을 했겠는가. 나무도 희망이 있거늘 인간은 짧은 생을 왜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가. 숲속의 병사들은 본향에 가기를 갈망한다. 아픔도 시련도 없는 그곳으로. 이들은 때가 되면 다시 기억될 수 있을까?

욥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냈다고 특정 종교의 틀로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다. 스코필드가 정신적인 부활을 한다고 (거창하게)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의 여정 곳곳에 종교와 신화적 색채가 짙은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차출되어 임무를 수행하던 그는 블레이크의 죽음을 기점으로 자기 의지를 갖게 된다. 블레이크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려다 아내와 딸의 사진을 꺼내든 스코필드는 분명 달라졌다. 1,600명의 목숨을 구하고 영웅이 된 것도 아니고(중령에게 꺼지라는 소리나 들었지) 언제 다시 총알받이가 될지 모를 일이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허무하고 슬프다. <1917>은 전쟁 영화인가, 라는 의문도 든다. 한 병사가 임무를 수행하며 겪는 심적 변화를 통해 불가해한 삶을 사는 인간을 생각해 본다.

 

 

연극적 상상력

<1917>이 해피엔딩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하겠다. 스코필드의 여정에서 '희망'과 '이유'라는 것을 보게 되고 끝내 임무도 완수하지만 <1917>은 서늘하고 쓸쓸하다. '능동적 허무주의' 정도로 표현하면 될까? 대구와 수미쌍관으로 시적인 함의와 감정선을 갖는 이야기는 (이름도 긴) '원 싱글 컨티뉴어스 쇼트' 기법으로 완성된다. 아예 스크립트를 쓸 때부터 이 기법을 전제로 했다. 이 흐름에 배우도 거대한 장치 속 톱니바퀴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스크린에 빠져들수록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느낌이다.

<1917>은 제1차 세계대전 말엽 한 영국 병사가 독일군의 함정에 빠진 아군 1,600명을 구하기 위해 24시간 안에 편지를 전달하는 이야기다. 이 전제는 신고전주의 작법을 연상케 한다. 신고전주의에서 중요한 것이 시간, 사건, 장소의 일치다. 사건은
① 단일 플롯으로
② 24시간을 넘기지 않으며 극 중에 흐른 시간은 관객의 시간과 일치해야 하고
③ 장소는 한 곳이어야 하며
④ 극은 5막으로 구성해야 한다
는 조건도 붙는다.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나의 쇼트가 수미쌍관을 이루는 전개는 장소의 일치와, 사건이 전개되는 주요 지점은 5막 구성과 연결된다. 비극적 인물은 도덕적 감화를 불러일으켜야 하며 가장 내밀한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절친한 '콘피단트'가 등장하는데 이는 블레이크-스코필드 콤비가 잘 보여준다. 신고전주의 작품은 종교적인 것에서 벗어나 인간이 삶을 다루었다. 하지만 기독교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덕성과 정의, 관용, 용기, 의무, 나약함 등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세속적인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불타는 이쿠스트 시가

 

 

폐허가 된 이쿠스트에 조명탄이 터진다. 무너진 주랑과 건물 사이로 불타는 교회가 보인다. 성벽 과수원이 그랬고, 폐허가 된 농가가 그랬지만, 이쿠스트의 밤은 외적인 리얼리티를 거부하고 의식의 상태를 극적으로 시각화하는 독일 표현주의와 닮았다. 고든 크레이그는 설교(말하기)를 줄이고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미래 연극'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했다. 모두가 알 수 있는 쉬운 연극, 삶의 상징인 움직임에서 비롯한 연극. 이를 위해 형태와 분위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기서 형태란 기술적 구현은 물론 예술성을 담보해야 한다. <1917>의 원 컨티뉴어스 쇼트는 쉬운 스토리, 시적 은유와 대구, 움직임과 공간의 시각화를 하나로 이뤄내며 그 자체가 곧 서사가 되었다.

형식이 이야기와 플롯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건 어느 예술에서든 부정된 지 오래다. 할 수 있으니까 해 보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문을 열었다. 1902년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 A Trip to the Moon>을 시작으로 도전적이고 선구적인 양식이 뿌리를 내려 현재에 이르렀고 이에 따른 영화 이론과 비평 역시 더욱 참신하고 정교해졌다. 개념적인 측면에서 원 컨티뉴어스 쇼트, 영화와 관객의 시간 일치는 이미 히치콕이 <로프>에서 시도한 바 있다. 이후 <도그빌>은 대놓고 브레히트식으로 연출하여 주제를 살렸고, <버드맨>은 연극을 주제로 압도적인 롱테이크를 보여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표면적으로) 전쟁 영화인 <1917>은 어떤가?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르며 단순한 스토리와 캐릭터, 신파적 요소가 입방아에 올랐다. 작품상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에 동의하지만, 극에 감정적으로 동화하게 하는 시각적 내러티브만큼은 탁월하다고 본다. 이 영화를 전쟁 영화로 한정하지 않는다면. 결론은, 꽤 괜찮은 영화라는 것(샘 멘데스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

 

 

다만, 마지막 '우리 할아버지 어쩌고' 하는 자막은 안 붙었으면 좋았겠단 생각이다(이러면 정말 ‘전쟁’ 영화인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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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2019)

Directed by Sam Mendes
Written by Sam Mendes, Krysty Wilson-Cairns
Cinematography Roger Deakins

 

Cast
George MacKay as William "Will" Schofield
Dean-Charles Chapman as Thomas "Tom" Blake
Mark Strong
Andrew Scott
Richard Madden
Claire Duburcq
Colin Firth
Benedict Cumberbatch

images : screenmusings

 

 

(묵힌 글 방출로 영화 본 지 근 1년 만에 마무리한 감상. 그새 재개봉도 해버렸다... 하도 시간이 지나서 기억 조작이 있을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