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일거리, 그리고 노동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1. 밑줄 긋는 남자

제목이 끌려서, 실은 열린책들의 '블루 컬렉션' 표지가 좋아서 읽었다. 프랑스 현대소설 시리즈 중 하나로 카롤린 봉그랑의 1993년 작이다. 

 

콩스탕스가 동네 도서관에서 빌린 책 <오렌지빛>에서 낙서를 발견하곤 '밑줄 긋는 남자'의 흔적을 쫓는 이야기. 콩스탕스는 포스코 시니발디, 샤탕 보가트, 에밀 아자르, 로맹 가리의 열혈 팬이다. 해서 오옷, 하며 빠져들었으나... 작중 화자가 25살 아가씨라 그런가, 나 같이 어둑어둑한 인간의 기대와 달리 분홍분홍한 소설이었다. 일종의 사랑 찾아 삼만리.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원작이라네(안 봐서 몰랐다만). 

 

이건 개인적인 의문인데, '누가(과자)', '스웨이드' 이런 것에 꼭 주석을 달아야 했을까. 그렇다면 '바스마티' 쌀에도 [인도에서 재배되는 장립종의 쌀이라고] 주석을 달아줘야지. 그리고 르루, 뒤라스, 폴리냐크, 키르케고르, 드 라로슈푸코 등등에는 주석이 없고 나보코프, 츠바이크, 가리, 페소아 등등에는 주석을 단 기준이 뭔지 궁금하네. 원본이 그런가. 프랑수아가 아닌 '뒤퐁' 드 라로슈푸코는 누구고, <오렌지빛>을 쓴 폴리냐크는 대체 누구야. 이야기의 매듭처럼 시작 역시 가상의 소설 인지도.

 

로맹 가리의 아버지가 예이젠시테인 감독 영화에 자주 출연한 배우였다는 정보는 흥미로웠다(근데 진짜인지 어머니로부터 따온 '설정'인지 헷갈린다). 문득 <새벽의 약속>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리고 <창백한 불꽃>도 읽어야겠다.

 

 

 

2. 쓰리 빌보드

눈 비벼가며 조조로 감상. 보길 잘했다. 재밌다.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물론이고 샘 록웰의 매력이 한가득 풍기는 <파고>풍의 드라마. 혹시나 했는데 <세븐 사이코패스>의 마틴 맥도나 작품이었네. 

실은 본지가 두 달은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이지만 인상적인 장면이라면,

• 불붙은 광고판 사이를 가로지르는 밀드레드. 왠지 <파고>의 눈밭 장면이 떠오르더라는.  
• 밀드레드의 외침, "로비!"
• 불타는 경찰서 안 딕슨
• 빨대를 꽂아 오렌지 주스를 건네는 웰비 

 

불타는 경찰서, 편지와 음악, 오렌지 주스는 딕슨이 개심한 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주제 또한 함축하고 있으니 실로 촘촘한 장치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이상한 엄마와 꼴통 경찰은 함께 길을 떠나게 되는데...

 

 

 

3. 기타 등등

<킬러의 보디가드> F-word 남발하는 영화를 이렇게 자지러지게 볼 수 있다니. 라이언 레이놀즈와 사뮤엘 잭슨, 명불허전이로고.

<삼국> 볼 때마다 새롭다. 제갈량의 고뇌에 다시 한번 눈물이. 세상사 일장춘몽. 

<북과 남> 히긴스+손튼 조합은 언제나 흐뭇. 그나저나 안나 맥스웰 마틴은 정말 안 나오는 영드가 없는 듯. 특히 시대극(착각인가).

그 외 보헤미안 랩소디(콕 집어),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머니!), 더 월(거기 누구 없소?), 빌리 엘리엇, 레인보우, 라크리모사, 샘 스미스 등등등 마구마구 감상 중.

오르부아르는 <맨 오브 마스크>로 개봉하는구만. <팬텀 스레드>는 도대체가 종로까지 나갈 여력은 없는데. 굿 다운로더로서 VOD 구매하려니 왜 이리 비싸. 

 

 

 

4. 월간 노동

빼곡히 짜인 노동 외에 마라톤 회의, 외근, 출장도 모자라 1박 2일 혁신 워크숍이라니. 스파르타 기숙 학원이 이런 것일까. 먹(이)고 교육, 먹(이)고 토론. 힘들다. 여름 즈음 또 워크숍... 하. 난 집 떠나는 거 싫다고(비행기 타는 여행은 좋다만). 게다가 모르는 사람과 숙박이라니. 혼자 가서 혼자 묵는 출장이 낫지. 

 

솔직히 누구를, 무엇을 위한 혁신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가치 실현이란 게 단기에 될 리 만무하고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겨자씨 같은 존재들이 고군분투하는 건데 그게 당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거기에 중간 위치는 되려 완충이라곤 없으니. 나 정말 늙었나 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노동 수행으로만 내 펑션 100중 130을 끌어 써도 모자라는데. 경주마가 따로 없구나. 쉬어도 쉬는 거 같지가 않아. 이대로 거품 물고 사그라들 것인가, 호모 루덴스로 거듭날 것인가. 마 선생이 노동자였으면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외치지 않았음을, 절대 <자본론>을 쓰지 못했음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일개 겨자씨란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