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인간 이후의 철학 — 인류세를 사는 인간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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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인간이 있든 없든 존재하는 게 명확한 세계에서 인간 또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여기서 인간이 산다는 사실이 왜 중요한가, 무엇이 요청되는가를 묻는 것이다.

 

시노하라 마사타케, <인간 이후의 철학> 중에서 (276)

 

 

 

인간 세계가 끝나더라도 세계는 지속한다. 인간이 있든 없든 지구가, 행성으로서의 '세계'가 존재한다. 인간 세계와 '세계' 사이는 공백, 수수께끼의 영역이다. 우리가 사유하는 순간에야 자각되는 어떤 공간. 그렇다면 '인간'이 이 세계를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시노하라 마사타케는 <인간 이후의 철학>에서 묻는다.

 

인간적: 사람다운 성질이 있는 것.
인간미: 인간다운 따뜻한 맛.

     — 표준 국어 대사전

 

사전의 정의대로 '인간적'이라는 표현에는 '따뜻함'이라는 함의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인간 세계가 아닌 저 수수께끼의 영역에서도 동일한 함의가 적용될까?

 

현재를 인류세라 칭할 만큼 지구 시스템은 인간의 척도로 재편되고 있다. 한창 코로나가 번져 인간 활동이 제약을 받자 도리어 회복하는 자연을 보며 인간이 잘못이다,라는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도 돌았다. 손 쓸 도리 없는 자연재해와 유행병에 대해 인간의 잘못,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경향성은 아이러니하지만 너무도 인간적이다. 46억 살 지구는 8억 년을 인간 없이 잘만 살아왔다.

 

"최고의 고양이 모형은 고양이다." 사이버네틱스 분야를 창시한 노버트 위너가 한 말이다. 인간은 이제 인간을 빼닮은 인공물을 만들며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세계의 확장은 '사람다운 성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일 터. 그렇다면 '인간 이후의 철학'은 비인간적인 장소, 언어적 정의에서 벗어나는 어떤 것, 인간적인 척도 너머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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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역사적 세계에 대한 타자로서의 세계를 지구 규모 사물의 침투로 경험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 부재의 세계가 아니다. 우리의 삶을 일부로 삼는 살아 있는 세계이다. 즉 이는 인간의 삶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면서 인간 세계를 다른 생명 형태와의 관련 속에 포함시키는 생생한 생명의 장으로서의 세계이다. 우리는 여기 살고 있다.

 

《새로운 인간의 조건》 중에서 (273)

 

 

 

기후학을 포함하여 현대의 '신비주의'는 우리의 현실 세계를 무어라 정의하기 힘들게 한다. 절대로 '어떤' 것이 아니고 언제나 '하나'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이후의 철학>에서 마사타케가 탐구하는 현실 세계는 생동하는 사물들이 우리를 '초대'하여 작용하게 한다는 스티븐 샤비로의 사변적 실재론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적 시선이 아닌 사물들의 창발로 세계를 조망한다. 마사타케의 여정은 티머시 모턴, 그레이엄 하먼, 퀑탱 메이야수,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등 현대 철학의 최전선은 물론 가라타니 고진, 니시다 키타로 등 일본 근현대 철학을 넘나든다. 아렌트와 하버마스의 한계도 짚는다. 요네다 도모코, 오카다 도시키 등 일본 예술가의 작품과 비욘세, 프랭크 오션 같은 대중음악으로 뛰어들기도 한다.

 

정보의 과잉, 끊이지 않는 SNS 피드로 현실 세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다. 현실 세계는 인간이 생산해 대는 "정보 과잉의 공공권"에서 벗어난 곳에 있다. 하먼은 언어와 수치로 객관화한 데이터가 아닌, 감각적인 매질의 상호 작용 — 소리, 냄새, 색조 등 — 으로 나타나는 객체성을 사고한다.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을 만난 모턴은 인간 세계 밖에서 사물의 잔향을 탐구한다. 음악을 필두로 예술과 더불어 느끼고 생각하는 모턴이 비외르크(비요크)의 음악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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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에서 눈은 마치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동시에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감각적인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를 파악할 수는 없다. 이로 인해 눈이 아름다운 것이다.

 

티머시 모턴,  <인간 이후의 철학> 중에서 (29)

 

 

 

눈은 파악할 수 없지만 감각할 수 있다. 눈은 서릿바람이다. 포근하게 휘감는다. 스산하고 청량하다. 감수성을 확장한다. 언어가 아닌 소리의 움직임을 감각하는 음악은 지금, 여기서 세계 밖 세계를 경험하는 장이다. 사물들의 평평한 연관이 아닌 "에테르 같은 감각적인 것"은 실재의 사물성이 없지만 현실의 사물이 실제로 상호 작용하기 위한 조건으로 현실에 존재한다(163). 존재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인간 이외의 것으로 감수성을 확장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세에 요청되는 인간의 조건 아닐까.

 

<인간 이후의 철학>은 사변적 실재론을 포함하여 낯설고 어려운 개념으로 가득하다. 인간 직관에 반하는, 비표상적 맥락 때문일 것이다.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다. 음악을 들으며 언어적 사고를 잠시 멈춰 보는 것도 좋겠다. 이 책이 언급하는 비요크, 프랭크 오션, P.M. 돈을 들어보자. 그러다 보면 지금, 여기 인간의 척도를 넘어 존재하는 존재의 전체성, 미를 넘어서는 숭고, 형태 없는 형태를 불현듯 감각하게 될지도 모를 테니.

 

 

 

 

인간 이후의 철학

인간 이후를 묻는다는 것은 인간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소멸한 이후에도 존재할 세계이자 인간 이전에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사유를 의미한다. 〈인간 이후의 철학〉은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버려지고 흔적으로서 남겨졌던 사물들이 지구 규모의 사물로 인간 세계에 침입하기 시작한 시대에 인간을 일부로 삼는 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감각할 것인가를 묻는다. 그러기 위해 현대 철학자와 사상가들의 개념과 사유를 가져오고 건축, 사진, 연극 등 예술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면서 세계에 대한 감각을 끌어내고 인간 중심적인 근대적 세계 설정을 넘어 인간의 조건을 새롭게 사유하기 위한 철학을 보여준다.

저자

시노하라 마사타케

출판

이비

출판일

2023.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