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아일랜드 일기 — 그리고 폼페이에서

유럽에서 다른 나라를 점령하기 위해 한 번도 군대를 파견한 적이 없는 유일한 나라.

유럽에서 가장 많은 수의 신부를 배출하는 동시에 산아 제한 없이 태어난 아이들을 이민 보내는 나라.

대기근과 이민 행렬만큼 버려지는 집이 즐비한 마을. 비바람이 들지 않도록 창에 박은 못은 아직 채 녹슬지 않았다.

 

 

아일랜드.

오랜 식민지 역사, 감자 대기근, IRA 분쟁 등 상흔의 이미지로 먼저 떠오르는 곳. 그런 질곡의 세월 속에 오히려 시간을 재촉하지 않는, 어쩌면 시간이 멈춰버린 곳, 그래서 목가적 낭만이 깃든 나라로 형상화되는 까닭은 뭘까.

 

 

 

 

아일랜드 일기

한 나라에 대한 인상을 18개의 단편소설로 전하고 있는 <아일랜드 일기>. 2차대전이 끝난 직후인 1950년대 초반 아일랜드의 시골지역을 여행한 작가의 눈으로 본 아일랜드의 단상이다. 단 한 번도 점령하기 위한 목적으로 외국에 군대를 파견한 적이 없는 유럽의 유일한 나라, 아일랜드. 이 책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지만 순수함을 간직한 나라와 지금은 경험할 수 없는 투박한 50년대의 일상을 18개의 이야기에 담아 보여준다.

저자

하인리히 뵐

출판

미래의창

출판일

2014.07.15

 

 

하인리히 뵐은 1950년대 아일랜드 서부를 여행하고 그 감상을 18개의 단편 소설로 녹여냈다. 뵐이 그리는 아일랜드에는 애수와 낭만이 넘친다. 덤덤하면서 절묘한 위트도 빠지지 않는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술 마시고, 사랑하고, 기도하고, 저주하는 것이다. 신마저도 격렬하게 사랑받거나 몹시 미움을 산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쁜 일은 언제나 너무 많이 일어나니까. 독일인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유머와 상상력을 잃어버리고 외친다. "이보다 더 나쁜 일은 없을 거야!" 다리를 삐거나 열차를 놓칠 때마다 소리친다. 아일랜드 사람은 다리가 부러지면 절뚝이며 움직인다. "다리 대신 목이 부러질 수도 있었어." 더 나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은 아일랜드 사람에겐 위로의 말이다. 최악의 상황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걱정하지 않을 거야.
이 말은 이백여 년 전 대기근을 피해 이민선에 몸을 실은 사람들, 떠난 땅에서 모국어가 사라져 버린 일(소작농들의 고통을 외면한 영국인 지주 보이콧은 자신의 이름을 사전에 남겼지만), 타국을 점령한 적 없는 나라에서 피의 일요일과 IRA 무장 투쟁으로 지난 세기까지 끊임없는 분열과 갈등을 겪은 사람들이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인지 모른다. 슬픔을 내면화한 듯한 삶의 태도는 우울하기보다 아름답게 그려진다. 세상의 비극을 납득하려 애쓸 필요가 있는가.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을. 태양이 찬란하게 타오르는 아침보다 달빛이 고요하게 흐르는 한밤중이 더 풍요로울 수 있다.

 

희망이 사라졌으니 회한도 두려움도 없이 내 안에 선은 이제 없다고 시인은 노래했지만 애초에 두려운 것도, 뉘우칠 것도 없으면 희망도 필요 없는 것 아닐까. 희망을 품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을 살기 때문이다. 식초 여섯 방울의 값을 두고 다투고, 나라가 정한 시간 외에 맥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굴려 산 하나를 넘어간다. 시간의 바퀴가 모호하게 굴러가는 <아일랜드 일기>는 상상력과 유머가 가득하다. 시간이, 냄새가, 빛깔이, 촉감이 행간을 따라 너울댄다. 이런 필치는 10장 ≪가장 아름다운 발≫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늦은 밤 왕진을 간 남편의 경로를 지도로 훑는 아내. 은빛 손톱은 카메라의 줌-아웃처럼 우리를 안내한다. 의사 아내의 상념으로만 만났지만, 나는 메리가 얼마나 강인하고 선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메리의 남편은 애단이다. 애단의 성은 '엠씨 나마라'다.
뭔가 이상하다. 장의 뒷부분에는 어느새 애단 나마라, 메리 나마라로 바뀌어 있다. 감이 오는가? 이 부부의 성은 맥나마라McNamara다. 아, 이런 치명적 오기가. McDermott, McCarthys도 졸지에 다른 사람이 됐다. <아일랜드 일기>의 지명, 인명 표기는 좀 어색하다. 국립국어원의 외국어 표기 규정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리메리크보다는 '리머릭'이, 도르제트보다는 '도싯'이 낫지 않나. 독일 작품이라 독일식 발음대로 표기한 걸까. 맥주 한 잔을 위해 자전거를 열심히 굴린 이는 쇄메스가 아니라 셰이머스Seamus다.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를 쇄메스 히니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Seamus는 영어 James에 상응하는 대표적인 아이리시 이름이다.)

 

내게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히니보다 친숙한 셰이머스가 따로 있다. 핑크 플로이드의 곡 ≪Seamus≫다. 이 노래의 백 보컬 이름 역시 셰이머스인데 그의 정체는 스몰 페이시스의 프론트맨 스티브 메리어트의 반려견이다.

 

나는 부엌에 있었어
개 셰이머스는 밖에 있었지
그래, 난 부엌에 있었어
​늙은 개 셰이머스는 밖에 있었지
알다시피 해는 천천히 져
하지만 내 늙은 개는 이내 앉아 울부짖었지

라는 노래에 맞춰 소울 넘치는 하울링을 선보이는 셰이머스.

 

≪Seamus≫가 수록된 앨범 Meddle에는 내가 무척, 매우, 아주 좋아하는 곡 ≪Echoes≫가 있다. 또 다른 의미로 ≪Echoes≫를 좋아하는 이유는 1971년 라이브 공연 때문이다. 장소는 폼페이 원형 극장.

 

 

 

잊혀진 도시 그리고 무관중 라이브.
서기 79년 여름날, 화산 폭발로 한 도시가 잿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폐허가 된 언덕 위로 잡초와 덩굴이 무성하게 자랐다.

시간이 멈춰버린 곳. 베수비오 화산재 속에 잠들어 있던 '도시 La Citiva'는 보물찾기 열정에 사로잡힌 유럽 제국에 의해 1763년 '폼페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폐허로 남은 폼페이 원형 극장에서 핑크 플로이드가 연주를 한다. 텅 빈 극장에는 다른 세상의 음악 — 목가적 외침과 우주적 속삭임 — 이 울려 퍼진다. 시간이 사라진 도시에서 기쁨과 슬픔, 절망과 공포의 감정은 우리의 몫이다.

 

 

LIVE AT POMPEII - Cinema Concert

 

 

감독인 아드리앵 마벵은 이 고대 도시에 발을 디딘 순간, 이곳이야말로 핑크 플로이드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확신했다. 현실적으로는 지역 문화재 관리국의 허가가 필요했는데 나폴리 대학교에서 고대사를 가르치던 카르푸티 교수의 도움이 컸다. 카르푸티 교수는 핑크 플로이드의 팬이었는데 관리국 담당자를 설득할 때 공연 동안 단 한 명의 팬도 없을 것이라 약속했다고. <폼페이 라이브>는 핑크 플로이드 최고의 라이브 공연이자 콘서트 필름이라는 평가와 함께 유산이 되었다. 밴드가 다음 해 발표한 음반은 <The Dark Side Of The Moon>이다.

 

2016년 데이비드 길모어가 폼페이를 다시 찾아 1971년 공연(+릭 라이트)을 회상하기도 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길모어는 라이트 없이는 ≪Echoes≫를 연주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2016년 폼페이 세트리스트에 ≪Echoes≫는 없었다. 이 곡은 라이트와 길모어의 음악적 대화(길모어의 표현으로 텔레파시)가 무르익은 곡이다. ≪Echoes≫의 마지막 공연은 2006년 폴란드의 그단스크 조선소 콘서트로 노년의 두 음악가가 그야말로 텔레파시를 주고받는다.

 

1. Echoes, Part 1
2. Careful With That Axe, Eugene
3. A Saucerful of Secrets
4. One Of These Days Set The Controls For The Heart Of The Sun
5. Mademoiselle Nobs
6. Echoes, Part 2

1971년 폼페이 세트리스트. ≪Echoes≫는 앞, 뒤로 파트를 나누었고 셰이머스 대신 마드무아젤 놉스가 함께한다. ≪A Saucerful of Secrets≫도 참 좋아하는 곡이다. 폼페이 공연은 공간, 선율, 연주 삼박자가 빚어낸, 그 자체가 아방가르드 퍼포먼스. 

 

 

 

PINK FLOYD - A SAUCERFUL OF SECRETS - LIVE AT POMPEII

 

 

 

그렇다. 음악이었다.
<아일랜드 일기>를 읽으며, 어색한 외국어 표기에 갸웃하며 떠오른 음악들. '리메리크' 출신의 돌로레스 오리어던(크랜베리스)은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Linger≫와 ≪Dreams≫를 발표한 후에도 과자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울 정도로 빈곤했다. 오리어던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과 근현대까지 이어진 아일랜드 역사 때문인지 크랜베리스의 음악에는 공허함과 슬픔의 정서가 아름답게 깔려있다. 아일랜드의 독특한 심상, 그것은 음악이었다.

 

보노(U2), 엔야, 데미안 라이스, 코어스, 시네이드 오코너, 호지어, 글렌 핸사드, 코다라인 등등등. 아일랜드 음악에는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무엇이 있다. 신은 시간을 충분히 만들었다고 믿는 아일랜드 사람들. 시간이 억겁이 된 곳에서 들려오는 음악. 들을 시간은 충분하다. ​

옥에 (치명적인) 티가 있어도 옥은 옥이다. 하인리히 뵐의 '일기'를 읽으며 아일랜드에 관한 내 이해가 풍성해졌다. 지식이 아닌 감성으로. 아일랜드에 가면 음악을 실컷 들어야지.

 

여행의 물꼬가 다시 트이는 이때, 비행기에 몸을 싣는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도시를 걸으며, 마을을 배회하며, 시간의 메아리에 화답하듯 나홀로 뮤직비디오를 찍을지도 모르겠다. 아, 그전에 만료된 여권을 만들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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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아일랜드 일기>는 절판이다. 번역이 개정되어 새로 나오면 좋겠다. 특히 이름 Mc... 고쳐야 할 터다. 저들이 래퍼가 아니라면.

옥은 티가 있어도 옥이지만 너무 큰 티는 그 빛을 가린다.